존재이다. 즉 자신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여기에서 윤리적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박선목(1987), 서양 윤리학의 흐름, 세진사, pp.230-231.
이 글에서는 세 명의 실존주의 철학자-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철학을 소개하고, 실존주의
존재하는 인간은 객관화될 수 있는 개념상의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 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서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며 살아 가고 있다. 주변의 존재자들을 도구로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의사를 소통하며 자기 자신을 자유
죽음 등에서 비롯되는 허무와 불안의 정조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이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확신을 끌어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敎育哲學 및 敎育史》, 文炯滿 著, 螢雪出版社, 1991年 - p.300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실존을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그 자신의
실존주의의 개념
실존주의의 중요 개념인 實存(existence)란 무엇인가? 이 말은 라틴어인 existentia에서 유래한 말로서 어원적으로는 ex (밖에), sistere (나타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현실존재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실존이란 인간 본래의 자기라는 뜻이요, 실존주의란 그러한 본래의 자기를 찾으려고 하는 태
실존주의의 이론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철학파에 비해 체계적으로 교육을 논하지 않았으나 그 중에서 볼노오(Bollnow)의 ‘실존철학과 교육학’에서 비교적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920년대까지의 교육은 인간 안에 부여되어 있다고 여겨진 창조적 능
인간이 동물, 식물, 광물과 공유하는 일정한 ‘물적 존재’를 일컫는 것이고, 대자 존재는 인간이 단지 다른 인간하고 공유하는 움직이는 ‘의식적 존재’를 일컫는다. 이에다 사르트르는 제3의 존재, 대타 존재를 첨가하였다. 이는 각각의 대자가 타자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객체로 만들면서 자신의 존
되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모두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로 20세기 중반에 커다란 존재들이었으며 소설가이며 비평가로도 유명하다.
야스퍼스(1883~1969.86세)는 유신론으로, 하이데거(1889~1976)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라고 구분되며 사르트르는 자신을 포함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하이데거를
사르트르는 인간의 창조주는 없다고 본다.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실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해 나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도